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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보도기사_출처 법보신문] 창원 비음산 불곡사 주지 도홍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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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불곡사운영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2회   작성일Date 26-09-12 16:54

    본문

    산중 도량 불곡사 40년 중창…창원 지역 전법의 새 지평 열어

    8살 때 절에 들어가
    고교 졸업 직후 출가

    근파·취봉 스님 뜻
    올곧이 이으며 정진

    교정교화 30년
    재소자 마음 보듬어

    연화학당 문 열어
    신도교육에 앞장

    우담문화관 건립
    문중 유산 후대에

    ‘불모산 범패’ 전승
    기록·보존에 큰 원력

    “안정사 성역화 시급
    총무원, 서울 이전 필요

    법화종 교구 활성화를 강조하는 도홍 스님은 “서울·경기에 흩어진 사찰들을 다시 결집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법화종 교구 활성화를 강조하는 도홍 스님은 “서울·경기에 흩어진 사찰들을 다시 결집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토요일이면 소년은 법당을 청소했다. 그중에서도 관음단만큼은 먼지 하나 남지 않도록 정성껏 닦았다. 그곳에 모셔진 관세음보살 불화가 어린 눈에도 참 곱고 아름다웠다. 소년은 청소를 마친 뒤에도 한동안 그 앞에 머물렀다.

    “항상 마주보고 무언의 대화를 했습니다.”
    창원 불곡사 주지 도홍(道弘) 스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김해 혜원사에서의 기억이다.
    1963년 2월, 여덟 살 소년은 부친 취봉(翠峯) 스님의 손에 이끌려 산사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절에서 생활하며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반드시 지켜야 할 일과가 생겼다. 학교에 가기 전 부처님 전에 세 번, 관세음보살 전에 세 번 절을 올렸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시 똑같이 절해야 했다. 하루 열두 번, 1년 365일 거르지 않도록 취봉 스님이 정한 규율이었다.

    어린 마음에 매일 이어지는 참배가 달가울 리 없었다. 취봉 스님이 일찍 출타한 날이면 법당에 가지 않고 곧장 학교로 달려가기도 했다. 들키면 꾸중을 듣고 벌을 받았다.
    “먼 길을 떠나신 날에는 하루라도 절을 안 해도 된다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그러다 같은 반 짝꿍을 따라 교회에 갔다. 크리스마스에는 선물도 받았다. 그런데 교회에 다녀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관세음보살 앞이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때 이미 마음 한쪽이 관세음보살님에게 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관음기도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법회에 참여해 신도들과 관음정근을 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느낌도 경험했다.
    “관세음보살을 계속 부르다 보면 어느 순간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몸까지 가벼워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관음기도를 계속했고, 사춘기도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무탈하게 보냈습니다.”
    취봉 스님은 아들에게 “스님이 되어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를 바라보시는 눈빛에서 ‘넌 스님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출가를 결심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이미 절집의 여러 소임을 제법 해낼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도 ‘오늘 절에 행사 있지? 가봐라’ 하면서 조퇴를 시켜주셨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74년 3월, 혜원사를 떠나 불곡사로 옮겼다. 근파 스님과 은사 인연을 맺었고, 그 이듬해 사미계를 받았다.

    1974년 처음 마주한 불곡사는 지금과 딴판이었다. 마산에서 들어오는 버스가 하루 세 번밖에 다니지 않을 만큼 외진 곳이었다. 전각과 요사채는 낡았고, 양철지붕을 얹은 곳도 있었다. 지금 우담문화관이 들어선 자리에는 창원에서 진해로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던 주막도 있었다.

    도홍 스님은 그런 불곡사를 보며 언젠가는 도량을 제대로 일으켜야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1985년부터 하나둘 불사를 시작했고, 1990년대 들어 본격적인 중창에 나섰다. 1995년 제7대 주지로 취임한 뒤에도 원칙은 분명했다.

    “불곡사는 터가 4900㎡(1500평) 남짓이라 넓지 않습니다. 큰 건물을 짓기보다는 작은 전각들을 전통에 맞게 잘 배치해서 신도들이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는 도량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비 내리는 날의 불곡사 비로전과 관음전.
    비 내리는 날의 불곡사 비로전과 관음전.

    중창의 첫 전각은 관음전이었다. 당초에는 보물 ‘창원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된 비로전을 먼저 세우려 했지만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다. 대신 관음전부터 불사를 시작했다.
    “관음전을 짓고 나니까 그다음부터 일이 술술 풀렸습니다. 비로전, 칠성각, 명부전, 세음루, 요사채 등의 불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낡았던 도량은 하나둘 제 모습을 갖췄고, 새로 세운 전각과 요사채만 10여 동에 이른다.
    도량이 모습을 갖춰가면서 신도교육과 포교에도 힘을 쏟았다. 2006년 불교대학인 연화학당을 열어 지금까지 7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관음회와 성도회, 보리수합창단, 세음다회, 우담꽃꽂이회 등의 신행단체도 잇따라 꾸렸다. 창원불교사암연합회장을 맡아 종단의 벽을 넘어 지역 사찰의 화합을 이끄는 데도 앞장섰다.

    전법의 영역은 교정교화로도 넓어졌다. 1990년대 초, 오랫동안 창원교도소 교정교화에 힘써온 취봉 스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소임을 내려놓으면서 도홍 스님이 그 뒤를 이었다. 한때 정기법회에는 150~200명의 재소자가 참석했고, 지금은  한 달에 두 차례 중형을 선고받은 재소자 15명과 만나고 있다.  

    법문은 10분 남짓이었다. 이후에는 재소자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속내를 털어놓을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출소할 때 저를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지나 다시 교도소에 가보면 그 사람이 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저한테 인사하고 나간 사람이 20여 명 됐는데, 그중 5~6명이 다시 들어왔어요. 그걸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교화라는 게 예사롭게 생각해서 할 일이 아니구나’ 하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교도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온 교정교화가 30년을 훌쩍 넘겼다.

                  도홍 스님은 현재 사)우담종문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도홍 스님은 선대가 남긴 유산과 문중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잇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그 원력을 담아 최근 ‘우담문화관'을 낙성했다. 참배객들이 차를 마시며 쉬어가는 곳이자, 어산어장 우담 스님과 취봉 스님, 불곡사 2대 주지 철해 스님의 가사를 비롯해 불상과 서적, 고려시대 정병, 명·청시대 유물 등을 전시한 곳이기도 하다.
    “선대 스님들이 남긴 물건 속에는 문중의 역사와 스님들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잘 보존해서 후대에 전해줘야지요.”

    특히 우담 스님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다. 어린 시절 우담 스님이 요양을 위해 잠시 혜원사에 머물 때, 도홍 스님은 아침마다 밥상을 들고 방으로 갔다.
    “그때는 그저 문중의 큰스님이라고만 생각했지요. 나중에 보니 불공이며 범패며 후학들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어른이셨습니다.”
    우담 스님은 불모산 범패 전승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김해 장유사에서 후학들에게 범패를 엄격하게 가르쳤고, 그 문하에서 지역의 이름난 어장들이 배출됐다. 하지만 도홍 스님은 그 맥을 잇기가 어려워지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여러 소리가 섞이면서 불모산 범패 특유의 가락과 리듬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어요. 옛 어장 스님들은 대부분 입적하셨고 남아 계신 분들도 연세가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간직한 분들의 소리를 영상과 음원으로 기록해 전해야 합니다.”

    선대의 전통을 지키려는 원력은 자연스럽게 종단의 미래로 향한다. 오랜 분규와 갈등으로 법화종의 위상은 크게 약화됐지만, 도홍 스님은 여전히 종단의 저력을 믿는다.
    “화합만 한다면 잠재력이 발현될 겁니다. 융성했던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출발점으로 통영 안정사 성역화를 꼽는다. 안정사를 명실상부한 총림으로 정비하고 승가교육관을 세워 출가자와 말사 주지를 체계적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성보문화유산을 보존·전시할 성보박물관 건립도 강조했다.
    “그래야 법화종이라는 정체성이 생기고 질서도 잡힙니다.”
    각 지역 교구의 활성화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특히 서울·경기에 흩어진 사찰들도 다시 결집시켜야 합니다. 총무원도 지금의 대전에서 서울로 이전해야 합니다.”

    도홍 스님이 평소 사부대중에게 자주 강조하는 말이 있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다. 연꽃은 탁한 물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 스님은 그 모습에서 인간이 본래 지닌 불성을 본다.
    “우리 마음에 있는 불성도 항상 청정합니다. 그 불성을 찾아 드러내는 것이 곧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
    도홍 스님의 수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음기도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관음기도는 6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관세음보살을 칭명하고 ‘관음경’을 사경하고 있다.
    “불자님들에게 항상 관세음보살님을 많이 부르라고 합니다. 칭명하고 또 칭명해서 내가 부르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더 신심 있는 기도가 됩니다. 어디를 가든 관세음보살님께 의지하라고 합니다.”

    60여 년 전 혜원사 관음단 앞에서 관세음보살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던 소년은 이제 불곡사를 ‘비음산 관음도량’으로 가꿔놓았다. 보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신 화엄도량에 평생 이어온 관음신앙을 더한 것이다.

    “관세음보살님의 자비에 의지해 누구나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고 싶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삶의 원동력을 얻어갔으면 합니다.”
    40년 가까이 이어온 중창불사도 이제 마무리를 향하고 있다. 앞으로의 원력을 묻자 도홍 스님의 답은 분명했다.
    “이제부터는 불사보다는 전법에 더 힘을 쏟으려 합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홍 스님은
    1955년생. 1963년 김해 혜원사에 입산 해 불연을 맺었으며, 1974년 불곡사로 옮겼다. 근파 스님을 은사로 1975년 사미계를 수지했다. 1977년 우담강원을 졸업했으며, 1978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1995년부터 불곡사 주지를 맡고 있다. 창원교도소 불교교정법사회 회장, 창원불교사암연합회 제3·4대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가람 청소년 문화재단 이사(1998~)이자 사)우담종문회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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